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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철 답게 비구름이 전국을 뒤덮고 있다.
근래에 일부 지역에 한하여 가뭄이 들었기 때문에 내심 반가운 빗줄기였지만 대구, 부산 쪽은 장마로 인해 고생이 심하다는 소식이 들리고 있다.

역시 하나님이라도 벨런스 맞추는 작업이 쉽지는 않은 모양이지.
내가 왕년에 심시티 좀 했는데 노하우 좀 가르쳐줄까 보다. 키득~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오랜만에 옛추억을 되짚어보았다.
나란 인간 자체는 그리 재미 없지만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은 항상 파란만장 했기에 마음 속에 자리한 추억의 방은 여러가지 감정으로 도배 되어 있다.
방안에 가득한 추억이란 이름의 상자를 하나씩 열어보면 대부분 부끄럽고 챙피한 기억들 투성이지만 이 상자의 내용물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만큼 더 없이 각별하게 느껴진다.

상자 무더기를 이것 저것 열어보며 한참 뒤적이던 중 상당히 오래되어 보이는 상자를 하나 발견 했다.

아아... 익숙한 문양이다. 틈만 나면 꺼냈다 넣기를 반복해서 그런지 상자는 많이 닳아있었지만 내용물을 뜻하는 문양은 아주 뚜렷하게 남아있었다.

상자의 이름은 '연애'

연애라는 감정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어린 시절의 아련한 기억.
모든 면에서 불안정 했던 나에게 사랑이라는 것을 안겨줬던 그녀.
서로의 가슴 속에 사랑을 나눠 갖고 연애라는 감정을 주고 받고 싶었던 그녀에게 난 너무 무신경 했었다.
당시의 나는 내 가슴 속의 그것이 사랑이라 불리우는 것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을, 아니 자연스럽게 발동 시키는 방법 조차 몰랐으니 말이다.

결국 그녀는 내 무신경함에 지쳐 떠나갔고, 나는 그런 그녀를 붙잡지도 않았다.
그때는 그녀가 내게 다가왔던 이유도 몰랐고, 떠났던 이유도 몰랐다.
그저 아무것도 모른체 받아들였고 떠나보냈다.

내가 한 것이라고는 그녀가 떠나간 자리에 남은 추억이라는 이름의 기억을 조심히 포장해서 상자에 넣는 일 뿐이었다.

겉으로는 화가난 척 했지만 실은 남들이 하는 것을 어설프게 흉내낸 것에 불과했다.
돌이켜 보면 당시의 나는 메뉴얼대로도 동작하지 못하는 불량 인형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내 마지막 연애는 끝이 났고 시간은 쉼 없이 흘러갔다.

시간의 흐름에 맞춰 나는 나이를 먹었고 지식과 경험을 쌓으며 나라는 인격체를 조금씩 만들어 나갔다.

그녀와의 연락은 끊긴지 오래였고 소식을 알 길도 없었기에 그녀에 대한 것은 상자 속에 간직한 추억이 전부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와 연관된 물건을 보거나 사람을 만날 때면 습관처럼 상자를 꺼내 그 시절의 추억과 마주해 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때마다 새로운 사실을 하나씩 깨닫게 되었다.
그녀가 내게 보여주었던 관심과 사랑들을 말이다.

손목이 좋지 않아 한번씩 움찔거리던 내 손을 조심스레 걱정하던 그 마음.

DDR이 유행이던 시절이라 내게 보여주기 위해 한달 전 부터 연습을 하던 그 노력.

지금 보면 민망해서 미칠 것 같은 내 소설을 읽어주며 자신의 캐릭터도 넣어달라던 그 관심.

JPOP에 대해 크게 흥미를 갖지 않았던 그녀가 내가 좋다고 하는 음악을 즐겨 듣고, 가수 유닛의 팬홈페이지를 만들었던 것 까지...

모두 나를 위한 것이었고, 나를 알고자 함이었고, 함께 하고자 함이었다.

그녀가 했던 노력을 뒤로한체 나는 아무것도 몰라주었고, 그녀의 마음 고생을 헤아려주지도 않았었다.

상자를 열 때 마다 죄책감에 젖었고, 후회를 삼켰다.

모처럼 데이트가 있던날 그녀는 안중에 두지 않고 게임에 열중했던 기억을 떠올렸을 땐 그 시절의 내 아둔함을 산산조각으로 찢어버리고 싶기까지 하였다.

그런 나날이 계속되다보니 제법 나이를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애의 기회가 생기면 겁이나서 피하게 되었다.
소개팅도 이 핑계, 저 핑계를 들이대며 피했고, 무의식 중에 내 자신감을 깎아내렸다.
이젠 연애에 관련된 모든 것을 접하면 그녀를 떠올리게 되어버렸다.

오랜 시간을 함께 해온 지인들이 안타까운 눈으로 나를 보며 던지는 '바보'라는 한마디가 유독 내 마음을 무겁게 한다. 

앞으로는 잘 할 수 있다.
앞으로는 잘 할 수 있다.

몇번이고 되새기지만 내 과오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은 내 업이리니...




한참을 떠올리다가 다시 상자를 닫고 추억의 방을 빠져나왔다.
 
지난밤, 빗소리를 안주 삼아 죄책감을 마셨더니 오랜만에 밤에 취한 것 같았다.

나는 어느새 평소에 옛 인연들과 남긴 흔적을 찾으면서도 유독 찾을 수 없었던 그녀의 흔적을 다시 한번 찾아보고 있었다.





비가 완전히 그치고 서늘한 바람이 창가를 넘어 오는 새벽.
8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서 나는 우연히 그녀 것으로 보이는 이메일 주소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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